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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성립된 즈음부터 내 손아귀엔 늘 낙서가 가득한 삶의 지도가 들려있었다.
지도는 하도 많이 접었다 펴내 꼬깃해지기도, 여러 번 수정된 좌표와 경로가 덧씌워져 지저분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 지도를 놓지 않은 건 여러 관점에서 내가 향하고자 하는 목표점과 현재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다양한 경로 중 현재에도 활발하게 나아가고 있는 ‘직업’ 경로를 소개해본다.

큰 고민없이 선택한 첫 직업, 로펌비서

경영학도인 나는 대부분의 문과생들이 그렇듯 졸업반이 되자 대기업의 상대적으로 티오가 많은,
영업관리와 같은 직무에 벌떼같이 지원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지인의 추천으로 로펌비서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됐다. ‘엄격한 관리자’라는 MBTI를 가진 사람답게 수 년간 내 일정을 관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에 큰 고민없이 나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우선 취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했고, 주변에서 외모와 분위기 모두 잘어울린단 말을 많이 들은 것도 한 몫했다.)

그 날 바로 대형로펌의 비서직 공고에 지원했고, 운좋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 3개월이란 짧은 준비 후 취업에 성공했다. 당시 전공수업이 수두룩한 학교 수업과 아르바이트, 제2외국어학원, 취준을 병행하며 하루에 2~3시간의 수면시간으로 버텨왔기에 최종합격을 한 순간 이제 고생은 끝났구나, 이 곳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인 2년차, 오춘기와 진로 고민을 맞이하다.

수험생 때에는 학과보다 대학 간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취준생 때에는 직무보다 크고 좋은 회사를 들어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대로 직무보다 회사를 보고 들어간 첫 직장은 남들이 알아주는 큰 규모의 조직 속에서 만족스러운 연봉과 워라밸, 안정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또 부모님의 뿌듯한 표정에) 취업 후 1년은 그저 감사히 적응하며 보냈다. 그렇게 2년 차가 되고 나를 붕 뜨게 만들었던 거품이 걷히기 시작했다.마냥 감사하던 마음이 어긋나며 진로 고민을 곁들인 오춘기가 찾아온 것.

첫 번째 이유, 성향

스스로를 성취주의자라고 칭할 만큼 계획을 세우고 성취하는 것에 큰 기쁨과 자기효능감을 느끼는 나인데, 직무 특성상 업무적으로 성취감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상사의 일정과 업무 자료, 실적을 관리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읽지않은 메일을 리마인더하고.. ‘나’ 자신이 없는 업무에 가지고있던 성취감마저 빼앗기는 기분이였다. 퇴근 후 외국어(베트남어) 학원을 다니고, 자격증 공부를 해보고, 운동을 다니며 많은 책을 읽어봤지만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 직업관

나는 ‘일은 일, 나는 나! 퇴근 후가 내 하루의 시작이다’ 싶은 사람은 아니다. 요즈음의 여론과는 조금 다르지만 직업이 자아실현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일을 사랑하며 관련된 공부를 계속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는 삶을 꿈꿔왔다. 지금의 직업은 그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20대 중반에 찾아온 오춘기는 거진 2년동안 나를 뒤흔들었다.
맞지않는 직업으로 하루 대부분을 보내며 마음이 조금씩 병들어 갔고,이내 내 자신이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자 커리어 전환을 결심했다.

진로고민의 결론, 막다른 길의 입구로 되돌아가기

경영학도인 내가 개발자란 직업을 알게 된 건 영화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래, 나는 개발자가 되어야겠다!’ 란 생각이 든건 아니다. 앞서 말한 내 성향과 직업관을 파악하고, 이에 맞는 직업을 리스트업해 소거법으로 골라냈다. 이 과정은 2년 정도 걸렸다.

추가로 적성에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5개월 가량 생활코딩, 스파르타코딩클럽, 노마드코더 등의 온라인 강의를 통해 공부해봤다. 공부를 하며 느낀 건, 오타 하나에서 비롯된 에러에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고 새로운 기능을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 몇 시간을 구글링하는 작업은 꽤나 고통스럽다는 것. 하지만 코드가 실현되어 원하던 화면이 출력될 때의 짜릿함은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성취감이였고, 그 동안의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내게 개발자는 그 과정은 다소 고통스러울지라도 기능이 구현되었을 때 짜릿한 성취감과 자기효능감을 가져다주고, 공부하는 만큼 내 실력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직업이였다. 이는 내 성향 및 직업관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로펌비서로서 쌓아왔던 커리어와 경제적 안정, 주변의 시선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힘든 길을 걸어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의 힘듦보다 내가 느낄 자기효능감, 만족감이 더 클 것이라 생각해 과감히 커리어 전환을 결심했다.

현재진행중인 커리어 전환 여정

퇴사 후 개발학습을 위한 교육기관을 등록해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마냥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아나갔다.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의 학습 기간을 5개월 정도 보낸 뒤 스타트업에 취업했다.

이후 업무와 개인 학습을 병행하며 7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고, 좋은 기회를 만나 더 개선된 환경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현재는 이직 후 4개월이 지난 시점이며 이 곳에서도 매일 나의 위치를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의 목표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커리어패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역량, 그 역량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바로 이 곳인지 내 위치에 대한 고민은 늘 마음 한 켠에 존재한다. 그 고민을 애써 묻어두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지금 당장 해나아갈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미래에 대한 의지를 대변하는 지도를 놓지않는 이상,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